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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지하철의 빈자리 / 김영준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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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열린책들 편집이사 매일 지하철을 탄다. 앉지 않기로 한 지 오래되었다. 이유는 ‘앉으려고 들면 피곤해서.’ 그런데 며칠 전에는 다리가 좀 아팠다. 을지로4가역쯤에서 자리가 하나 비었다. 7인 좌석 중 끝에서 두번째 자리였다. 서둘러 갔지만, 앉지 못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빈자리로 옮긴 것이다. 방금까지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분홍색 임산부석이었기 때문이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교통약자를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자, 어린이 등’으로 정한 뒤, 이들을 위해 교통약자석을 설치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지하철에 고령자를 위한 경로석이 설치된 것은 1980년. 1호선밖에 없던 시절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2013년에 도입되었다. 설치가 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긴 하지만 교통약자가 아닌 이가 앉더라도 처벌 규정은 없다. 처벌하는 나라들도 있다. 한국은 아니다. 우리 법이 관여하는 것은 교통약자석이 ‘적법하다’는 것, 딱 여기까지다. 이 ‘처벌 규정의 부재’를 좋아하기는 힘든 일이다. 왜 강제하지 않을까? 왜 국가가 좋은 말은 먼저 하고, 정작 교통약자가 실제로 앉는 것까지는 보증하지 않는가? 왜 지하철 이용자들이 온갖 조마조마한 광경을 봐야 할까? 나는 지금 교통약자석에 찬성하는 입장에서 불평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약자석을 명확한 권리로 볼 수 없다는 회의론 역시 같은 지점을 겨냥하게 되는 건 흥미롭다. 국가는 강제할 자신이 없는 것을 함부로 국민에게 요구해도 될까? 누가 국가에 교육자 노릇이나 해달라고 했나? 요컨대 국가의 불철저한 개입이 양쪽 입장의 공통적 슬픔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 좋은 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지하철의 그 젊은 분을 보자. 그녀는 처벌받을 위험도 없었고 자리를 옮기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지만 다른 자리로 옮겼다. 순전히 도덕적 이유, 자신이 이 자리를 비키는 게 옳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애초에 거기 앉지 않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본인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건 나중의 행동으로 보아 명백하다. 우리는 사소한 거짓말을 뱉은 뒤 비참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있는데, 자격 없이 교통약자석에 앉아 있는 기분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통약자석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치르는 일종의 도덕 시험이다. 거짓말과 다른 점은, 거짓말은 자신의 것만 바로 알 수 있을 뿐이지만 교통약자석 위반은 마치 극장처럼 되어 있는 지하철 좌석 구조 때문에 누구나 잘 관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도덕 시험을 억압적이라고 간단히 규정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시험은 줄이기는커녕 좀 더 늘어나야 할 종류의 것이다. 만일 코로나 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도덕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 그게 이런 일상적인 연습 없이 갑자기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년의 저서 학부들의 논쟁>(1798)에서 칸트는 썼다. “선은 자유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는 국민을 선하게 만들 수 없고, 단지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선하게 될 기회를 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읽었다. 뭐든지 세밀하게 법으로 정해놓는 이상적인 사회가 있다면 개인은 도덕적 판단을 안 해도 되니 편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선 위법 아닌 것은 모조리 당당하게 합법이고, 구성원들은 서로가 도덕적 백치임을 발견하고 새삼 놀랄 뿐일 테니까. 우리가 아직 그런 상태가 아님을 확인해주는 장치가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예컨대 비어 있는 교통약자석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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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2, 2020 at 02:57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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